아소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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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소 내각은 2008년 9월 24일, 아소 다로를 내각총리대신으로 하여 출범했다. 내각은 출범 초기 중의원 해산 및 총선 실시를 요구받았으나,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해 해산이 연기되었다. 이후 지지율 하락과 각료들의 잇따른 사임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2009년 8월 30일 총선에서 자민당이 대패하면서 아소 다로는 퇴진을 표명했다. 2009년 9월 16일, 아소 내각은 공식적으로 사임하고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발족했다. 아소 내각은 경기 대책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 정책을 추진했으며, 가치관 외교를 통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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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내각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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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이름 | 아소 내각 |
대수 | 92대 |
총리 이름 | 아소 다로 |
총리 전직 | 중의원 의원, 자유민주당 총재 |
성립 연도 | 2008년 (헤이세이 20년) |
성립 월일 | 9월 24일 |
종료 연도 | 2009년 (헤이세이 21년) |
종료 월일 | 9월 16일 |
여당 | 자유민주당, 공명당 |
선거 |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해산 | 2009년 7월 21일 |
명단 | 아소 내각 명단 |
캐비닛 이름 | 아소 캐비닛 |
캐비닛 유형 | 해당 사항 없음 |
캐비닛 번호 | 92번째 |
관할 구역 | 일본 |
국기 | [[파일:Flag of Japan.svg|일본 국기]] |
재임 기간 | 2008년 9월 24일 – 2009년 9월 16일 |
정부 수반 | 아소 다로 |
정부 수반 이력 | 전 외무대신 (2005-2007) |
국가 원수 | 아키히토 천황 |
의회 현황 | 중의원 (하원): 자민당-공명당 연립 다수당 참의원 (상원): 자민당-공명당 연립 소수당 |
야당 내각 | 해당 사항 없음 |
야당 | 민주당 |
야당 대표 | 오자와 이치로 (2009년 5월 16일까지) 하토야마 유키오 (2009년 5월 16일부터) |
선거 | 해당 사항 없음 |
최근 선거 | 2009년 일본 총선거 |
의회 임기 | 제172회 국회 |
예산 | 해당 사항 없음 |
전임 내각 | 후쿠다 야스오 내각 |
후임 내각 |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
정치 정당 | 자유민주당–공명당 연립 |
기타 정보 | |
관련 링크 | 총리대신 관저 - 아소 내각 |
2. 경과
- 2008년
- 10월 2일: 아소 총리가 중의원 본회의에서 무라야마 담화 계승을 표명했다.
- 10월 3일: 중학교 학습 지도 요령 해설서의 독도 기술에 대해 "독도가 북방 영토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고유 영토임이 명확히 밝혀져 있다"는 답변서를 각의 결정했다.[98]
- 10월 10일:
- 내각관방참여 (지방 재생 담당)에 스에요시 고이치 전 기타큐슈 시장 기용을 발표했다.
- (EDT) 나카가와 쇼이치 재무대신이 G7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했다.
- 10월 16일: 헤이세이 20년도 1차 보정 예산이 성립되었다.
- 10월 26일: 도쿄도지요다구에서 아소 총리가 취임 후 첫 가두 연설을 했다.

- 11월 4일: 국적법 개정안을 각의 결정하고,[99] 제170회 국회에서 가결·성립시켰다.
- 11월 12일: 2조 엔의 "정액 급부금"을 결정했다.
- 11월 14일 ~ 11월 15일: 워싱턴 D.C.에서 긴급 정상 회담 (금융 서밋)이 개최되었다.
- 11월 22일 ~ 11월 23일: 리마에서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 정상 회담이 개최되었다.
- 11월 28일: 아소 총리가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대표와 당수 토론을 했다.
- 12월 4일: 일본 정부 동영상에서 아소 총리가 "1941년12월에 진주만 공격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100][101]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이듬해 2월 24일 정정을 거부하는 답변서를 각의 결정했다.[101]
- 12월 5일: 국적법 개정안과 개정 노동기준법이 성립되었다.
- 12월 9일:
- "새로운 고용 대책에 관한 관계 각료 회의"에서 3년간 2조 엔 규모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140만 명의 고용을 지원하는 추가 고용 대책을 결정했다.
- 계약이 종료된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택에서 퇴거시키지 않고 무상으로 대여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창설했다. 또한, 12일에는 주거비나 생활비 등 최대 186만 엔을 저리로 융자하는 것을 결정했다.
- 12월 12일:
- 중의원의 재의결로 신 테러 특별 조치법의 1년 연장, 금융 기능 강화법 개정안이 성립되었다.
- 정부의 청소년 육성 추진 본부가 청소년 육성 대강을 결정했다.
- 국립 암센터 등 6개 센터가 독립 행정 법인이 되는 것을 결정했다.
- 아소 총리가 총액 23조 엔 규모의 추가 경기 대책 "생활 방위를 위한 긴급 대책"을 발표했다.
- 12월 13일: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3개국 간의 미래 지향적인 포괄적인 협력 탐구를 내세운 공동 성명에 서명했다.
- 12월 16일: 하토야마 구니오 총무대신이 각 부처에 민간 기업 등과의 임의 계약을 경쟁성이 높은 일반 경쟁 입찰로 전환하도록 개선을 권고했다.
- 12월 18일:
- 정부의 교육 재생 간담회가 교과서의 질, 양의 충실 등을 요구하는 제2차 보고서를 아소 총리에게 제출했다.
- 일본과 호주의 외무, 방위 담당 각료에 의한 정기 협의 (2+2)가 도쿄에서 개최되어 상호 협력을 담은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 12월 19일:
- 보호자가 국민 건강 보험료를 체납하여 보험증이 없는 "무보험"이 된 아이가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험증을 교부하는 개정 국민 건강 보험법이 성립되었다.
- 재직 중의 불상사 등이 발각된 국가 공무원에게 퇴직금을 강제적으로 반납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개정 국가 공무원 퇴직 수당법이 성립되었다.
- 중소기업에 장애인 고용을 촉구하기 위한 개정 장애인 고용 촉진법이 성립되었다.
- 12월 22일: 문부과학성이 고등학교 학습 지도 요령 개정안을 발표하여, 여유 교육으로부터의 전환을 목표로 하는 내용을 담았다.
- 12월 24일:
- 세제 개혁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의 길을 제시한 "중기 프로그램"이 각의 결정되었다. 같은 날, 아소 총리는 2011년도부터 소비세율을 인상할 생각을 다시 표명했다.
- 중의원 본회의에서 민주당이 제출한 중의원 해산 요구 결의안이 부결되었다.
- 12월 25일: 임시 국회가 폐회되었다. (회기는 93일). 정부가 신규로 제출한 15개 법안 중 10개가 성립되었다.
- 12월 26일:
- 아소 총리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센카쿠 열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인 이상,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의 대상이 된다"고 발언하여, 중국 외무성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았다.[102]
- 2009년도의 개호 보수가 결정되어, 개호 직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전체적으로 3.0% 인상되었다.
- 하토야마 구니오 총무대신이 "정주 자립권 구상"의 추진 요강을 발표했다.
- 12월 27일:
- "비정규직" 지원을 위해 고용 촉진 주택 3만 호를 공급했다.
- 독도 문제 팜플렛을 새롭게 7개 국어로 제작했다.
- 12월 28일: 농업 법인에 대한 출자 제한을 완화하여 기업의 참가를 촉구했다.
- 2009년
- 1월 3일: 아소 총리가 이스라엘 군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공습에 대해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의장과 전화로 협의하고, 가자 지구 구제를 위해 총 1000만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할 생각을 밝혔다.
- 1월 4일:
- 아소 총리가 신년 기자 회견에서 아키히토의 즉위 20주년, 결혼 50주년을 축하한 후 서예로 "안심" "활력"의 글자를 선보였다.[103] 또한, 미국발 세계적인 금융·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결의를 표명했다.
- 중국의 가스전 "카시" 단독 개발에 대해 "합의 위반"이라고 항의했다.
- 1월 5일:
- 제171회 국회가 소집되고, 2008년도 제2차 추경 예산이 제출되었다. 나카가와 쇼이치 재무대신이 경제 대책에 대해 설명하는 재정 연설을 했다.
- 파견촌을 위해 구 학교 시설을 숙박용으로 개방했다.
- 1월 6일: 아소 총리가 경제재정자문회의를 개최하고, 경제 재정의 중장기 방침과 10년 전망에 대해 논의했다.
- 1월 8일:
- 아소 총리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1차 보정 예산, 2차 보정 예산, 2009년도 예산을 끊임없이 실시해 나가는 것이 불황에서 탈출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을 밝혔다.
- "수단 공화국에서의 무장 해제·동원 해제·사회 복귀 계획"에 관한 서한을 교환했다.
- 연금 기록 누락 대응 처리를 신속화하기 위해 대응 직원을 280명에서 500명으로 증원했다.
- 1월 9일: 아소 총리가 안전 보장과 방위력에 관한 간담회를 개최하고, 2004년에 각의 결정된 "방위 계획의 대강"을 재검토하기로 했다.[104]
- 1월 11일:
- 아소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의 미테라이 후지오 회장과 도요타 자동차의 장 후지오 회장 등 18명의 재계 인사가 동행했다.[105]
- 캄보디아에 대한 무상 자금 협력 "로렌체리 머리공 개수 계획(상세 설계)" 및 "감염증 대책 강화 계획"을 실시했다.
- 1월 12일: 아소 총리와 이명박 한국 대통령은 "국제 사회에서 함께 공헌하는 한일 관계"를 표명하고, 아프가니스탄, 북한, 세계 금융 위기 등에 대해 구체화하여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 1월 13일:
- 아소 총리가 "신형 인플루엔자 대책 본부 회의"를 개최하고, 국내 침투를 막기 위한 "수제 대책"을 최우선 과제로 하면서도 국내에 침투했을 경우의 대책에 대해서도 검토했다.
- 마쓰나미 겐타 내각부 대신 정무관이 중의원에서의 2008년도 제2차 추경 예산안 표결을 기권하고,[106] 사표를 제출했으나,[107] 아소 총리는 사임을 인정하지 않고 면관했다.[108] 후임으로 오카모토 요시로를 임명했다.
- 1월 14일: 아소 총리가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팔레스타인 자치구 가자 지구에서의 즉시 휴전을 강력히 요청했다.
- 1월 15일: "교통 분야에서의 지구 환경·에너지에 관한 각료 회의"가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가네코 가즈요시 국토교통대신이 참여하여 산업 분야별 이산화탄소 감축 가능량을 산출하는 "섹터별 접근법"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 1월 21일: 장애 복지 서비스의 자산 요건을 철폐했다.
- 1월 23일:
- 이오섬 활주로를 섬 내 이설하기로 했다.
- 유기 화학 무기 처리 "할바령" 사업을 동결하고, 사업비를 대폭 삭감했다.
- 1월 25일: 항공기에서 로켓 발사, 실용화 연구에 착수했다.
- 1월 27일:
- 2008년도 2차 보정 예산이 성립되었다.
- 환경성이 처분 반감을 목적으로 개, 고양이 수용 시설을 확충했다.
- 1월 29일: 식품 위장 업체를 모두 공표하기 위해 JAS법의 운용 지침을 개정했다.

- 2월 1일: 게릴라성 호우 대책을 위해 전국 8곳에 수해 예보 센터를 설치했다.
- 2월 4일:
- 센카쿠 열도 주변에 해상보안청의 헬기 탑재 순시선을 상시 배치하여 영해 침입 감시를 강화했다.
- 오키나와의 불발탄 피해에 10억엔 기금을 조성했다.
- 2월 14일: 세계 금융 위기 지원을 위해 국제 통화 기금(IMF)에 1000억달러를 출자했다.
- 2월 17일: 나카가와 쇼이치 재무대신이 기자 회견에서 사임을 표명했지만, 그 후 다시 회견을 열고 즉일 사임을 표명했다.[109] 요사노 가오루 국무대신이 재무대신과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 (금융)을 겸임했다.
- 2월 18일 (VLAT):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초청에 응해 아소 총리가 사할린 남부를 방문하고,[110] 북방 영토 4개 섬 일괄 반환론의 포기에 언급했다.[111]
- 2월 19일: 소말리아 지원 그룹 '소말리아 국제 연락 그룹'에 참가했다.
- 2월 23일: 한일 신시대 공동 연구 프로젝트가 발족했다.
- 2월 24일:
- 아마리 아키라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이 내각 개조의 시기나 규모에 언급하여 논란이 되었다.[113][114][115]
- (EST) 미국에서 일미 정상 회담을 했으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아소 총리의 영어 발언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백악관 공식 회견록에는 '청취 불가',[116] '알아들을 수 없음'으로 기재되었다.[117]
- 3월 4일:
- 2008년도 2차 추경 예산 관련 법안이 중의원의 재의결로 성립되었다.
- 센카쿠 열도가 미일 안보 조약의 대상임을 미국 연방 정부에 확인했다.
- 3월 6일: 니트족은둔형 외톨이 지원 법안을 각의 결정했다.
- 3월 13일: 소말리아 해역의 해적 대책을 위해 해상 경비 행동 발령. 다음날 14일에 호위함 2척이 구레 기지를 출항했다.
- 3월 16일: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유식자 회합' 개최(- 3월 21일).
- 3월 18일: 해양 기본 계획을 각의 결정하고, EEZ 자원의 상업화를 명기했다.
- 3월 27일: 2009년도 당초 예산이 성립되었다.
- 3월 30일: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소 총리가 독일의 경기 대책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여[118][119][120], 앙겔라 메르켈 연방 수상이 반박하는 등 논란이 되었다.[121][122]
- 4월 1일:
- 아소 총리가 영국 런던에서 브라운 영국 총리,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와 회담하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이 실시될 경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위반으로 대응할 것을 확인했다.
- 아소 총리가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과 회담하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위반임을 확인했다.
- 가와무라 내각 관방 장관이 수단의 바시르 대통령 특사와 회담하고, 국제 형사 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 아소 총리가 우정 민영화 위원에 사이토 키요미를 기용했다.
- 4월 2일:
- 아소 총리가 제2차 금융 정상 회담에 참석하여, 아시아 각국을 대상으로 최대 2조 엔의 정부 개발 원조(ODA)를 공여하는 방침을 공식 표명했다.
- 아소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과 북한의 미사일 문제를 논의하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이 실시될 경우,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으로 안보리에 상정하는 것에 대해 찬성을 받았다.
- 북한 경제 제재를 1년 연장하는 방침을 결정했다.
- 4월 3일:
- 아소 총리가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과 회담하고, 중국산 독만두 사건이나 동중국해 가스전 공동 개발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 정부의 우주 개발 전략 본부가 우주 기본 계획 5개년 계획의 골자안을 제출했다.
- 4월 5일: 북한이 대포동 2호 발사. 아소 총리는 북한에 대해 엄중한 항의를 하고 유엔에 안전 보장 이사회 긴급 회합 소집을 요청했다.
- 4월 6일:
- 아소 총리가 요사노 재무 대신과 회담하고, 추가 경제 대책의 재정 지출을 국내 총생산(GDP)비율로 2%를 넘는 규모(10조 엔)로 하도록 지시했다.
- 아소 총리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과 회담하고, 에너지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 아소 총리가 지적 재산 전략 본부의 회의를 개최하고, "제3기 지적 재산 전략의 기본 방침"을 결정했다.
- 4월 7일:
- 아소 총리가 국가와 지역의 역할 분담 및 각 분야의 정책 목표 등을 제시하기 위한 유식자 회의 "안심 사회 실현 회의"를 설치할 것을 표명했다.
- 중의원 본회의에서 북한의 장거리 탄도 미사일 발사에 항의하는 결의가 가결되었다.
- 경제 재정 자문 회의에서 경제 위기 극복에 필요한 재정 지출 규모를 협의했다.
- 4월 8일: 제43회 국가 공무원 합동 초임 연수 개강식에 참석하여 공무원들을 격려했다.
- 4월 9일:
- 아소 총리가 일본 기자 클럽에서 2020년까지의 일본 국가 전략을 설명했다.
- 정부의 IT 전략 본부가 "디지털 신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략 3개년 긴급 플랜"을 결정했다.
- 아소 총리가 존 매케인 미국 상원 의원과 회담하고, 미일 동맹의 강화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 아소 총리가 국제 럭비 평의회의 라파세 회장과 회담했다.
- 아소 총리가 퇴임하는 제임스 켈리 주일 미 해군 사령관에게 감사를 표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 4월 11일: 아소 총리는 ASEAN+3 참석을 위해 태국 파타야를 방문했지만, 데모 활동으로 인해 헬리콥터로 현지를 탈출, 일본 정부 전용기로 긴급 귀국했다.
- 4월 24일: 세계 보건 기구(WHO)는 미국과 멕시코에서 신종 인플루엔자 세계적 유행이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123]
- 4월 25일: 아소 총리가 아시아 에너지 생산 및 소비국 장관 회의에 참석했다.
- 4월 26일: 아소 총리가 신종 인플루엔자 검역 체제 강화 및 재외 일본인에 대한 정보 제공 등의 체제를 지시했다.
- 4월 28일:
- 일본 정부는 "신종 인플루엔자 발생"을 선언하고, 아소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신종 인플루엔자 대책 본부"를 설치했다.[125]
- 국립 미디어 예술 종합 센터 계획에 대해, 하토야마 유키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 5월 4일: 체코 방문 당시, 아소 총리가 방문 국가 이름을 잘못 호칭했다.
- 5월 7일: 마스조에 요이치 후생노동대신이 신종 인플루엔자 대책과 관련하여, 학교의 임시 휴업 조치 등 행동 계획의 탄력적 운용을 검토하고 싶다고 표명했다.[127][128]
- 5월 9일: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일본 국내에서 처음으로 신종 인플루엔자 감염자가 확인되었다.[129]
- 5월 15일: 안심사회 실현 회의에서 아소 총리가 후생노동성 분할 검토를 표명했으나,[130] 이후 번복하는 등 혼선을 빚었다.
- 5월 16일:
- 효고현고베시내 현립 고등학교에서 해외 여행 경력이 없는 고등학생의 신종 인플루엔자 감염이 확인되었다.
- 일본 정부는 신종 인플루엔자 대책 행동 계획의 대책 레벨을 제1단계(해외 발생기)에서 제2단계(국내 발생 초기)로 올렸다.[142]
- 5월 22일:
- 일본 정부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약독성임을 감안한 새로운 "기본적 대처 방침"을 결정했다.[143]
- 후생노동성은 "운용 방침"을 정하여, 지역별로 다른 대책을 시행하기로 했다.[144]
- 수제(水際) 대책도 대폭 축소되었다.[145]
- 6월 11일: 영해 등에 있어서 외국 선박의 항행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다.
- 6월 12일: 하토야마 구니오 총무대신과 토이다 토오루 후생노동대신 정무관이 사직했다.
- 6월 13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결의 1874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 7월 2일: 하야시 요시마사와 하야시 간오 2명이 재입각했다.
- 7월 13일: 아소 총리가 도쿄도 의원 선거에서의 자유민주당 패배에 대해 "자민당 내부의 혼란이 악영향을 미쳤다"[146]라고 분석했다.
- 7월 14일: 고가 마코토 자유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과 오츠지 히데히사 자유민주당 참의원 의원 회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 7월 17일: 「주민기본대장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이 성립되어, 2012년에 외국인등록법은 폐지되고, 재일 외국인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주민기본대장으로 관리되게 되었다.[147]
- 7월 24일: 후생노동성은 신종 인플루엔자의 전수 검사를 전국에서 중단하도록 통지했다.[148]
- 8월 9일: 태풍 제9호로 인해 다수의 피해가 발생했다.
- 8월 11일: 스루가만 지진 발생으로 큰 피해가 발생했으나, 아소 내각은 미흡한 대처로 비판을 받았다.
- 8월 15일: 아소 총리가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했다. 노다 세이코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 8월 18일: 요사노 가오루 재무 대신이 현기증을 일으켜, 건강 이상설이 제기되었다.[155][156]
- 8월 27일: 일본 우정의 니시오카 타카시 회장 승진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 8월 30일: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가 확정되고 자유민주당이 패배하면서, 아소 총리는 퇴진을 표명했다.[160]
- 8월 31일: 아소 총리가 자유민주당 총재의 사임을 정식 표명했다.[162]
2. 1. 내각 구성 (2008년 9월)
2008년 9월 24일 제170회 국회에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가 열렸다. 중의원은 자유민주당 총재 아소 다로를, 참의원은 민주당 대표 오자와 이치로를 지명하여 양원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양원협의회에서도 합의에 이르지 못해, 중의원의 우월 원칙에 따라 중의원에서 지명된 아소 다로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선출되었다.[1]같은 날, 아소 다로는 천황으로부터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국무대신 및 내각관방부장관 등 인증관 임명식을 거쳐 아소 내각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일반적으로 내각관방장관이 각료 명단을 발표하지만, 아소 다로는 직접 각료 명단을 발표하고 각 장관의 역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 비서진 임명 인사 브리핑을 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2008년 9월 25일, 내각은 내각법 제9조에 따라 총리에게 사고가 발생할 경우 임시 대리 취임 순위를 가와무라 다케오, 요사노 가오루, 하토야마 구니오, 나카가와 쇼이치, 아마리 아키라 순으로 결정했다.[36] 또한, 이날 각료 간담회에서는 행정 및 재정 개혁의 일환으로 역대 내각과 마찬가지로 장관 급여의 1할을 국고에 반납하기로 합의했다.
9월 29일, 아소 총리는 기자단으로부터 내각의 이름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내각의 이름은 여러분(언론)이 정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내각의 이름을 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37]

2. 2. 중의원 해산 및 총선 요구 (2008년 9월 ~ 2009년 7월)
자민당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얻은 아소 다로 총리는 "선거의 얼굴"로서 중의원 해산 및 총선 실시를 요구받았다. 언론과 야당은 아소 내각을 "선거 관리 내각"으로 묘사하며 압박했다.[4][5][6] 아소 총리는 2008년 10월 중의원 해산을 계획하고 연설문까지 준비했으나,[7]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한 주가 지수 폭락과 지지율 하락으로 인해 해산을 연기했다.[8]
아소 내각은 초기 약 50%의 지지율을 보였으나, 2008년 12월에는 20%대로 급락했다. 당내 분열[9]과 함께, 다음 선거에서 아소 총리의 당 장악력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10]
2009년 2월부터 자민당 내에서 아소 총리 사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22] 일본 우정 민영화를 둘러싼 당내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23] 일부 당 고위 관계자들은 2009년 5월 아소 총리의 결정을 막기도 했다.[24] 고이즈미 전 총리를 비롯한 전직 당 고위 관계자들은 공개적으로 아소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다.[25][26]
결국 아소 총리는 2009년 7월 13일, 중의원 해산과 8월 30일 총선 실시를 발표했다. 이는 이례적인 해산 예고였다. 7월 14일에는 참의원에서 내각총리대신 불신임 결의안이 통과되었다.[27] 일부 당원들은 2008년 가을에 총선이 치러졌어야 했다고 주장했고,[28] 다른 당원들은 자민당이 승리하더라도 아소 총리가 계속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29]
2. 3. 퇴진 (2009년 8월 ~ 9월)
2009년 8월 30일에 실시된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기록적인 대패를 당했다.[30] 요사노 가오루 재무 대신, 사토 쓰토무 총무 대신, 시오노야 류 문부 과학 대신, 하야시 모토오 국가공안위원장, 아마리 아키라 행정 개혁 담당 대신, 노다 세이코 소비자 담당대신 등 6명의 현직 장관이 지역구에서 낙선했다가 이후 비례대표로 부활했다. 같은 날 밤, 아소 총리는 NHK와의 중계 회견에서 사실상 퇴진을 표명했다.[30]선거 후 9월에 예정되었던 국제 회의에서, G20 재무 장관·중앙 은행 총재 회의에는 요사노 재무상이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했고, WTO 각료회의에는 경제산업대신과 농림수산대신이 불참하여 "국무위원으로서의 책임과 끝까지 해야 할 일을 포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0]
2009년 9월 16일, 특별 국회가 소집되고 임시 각의에서 내각 총사퇴가 결정되었다.[31] 아소 총리는 퇴임 기자 회견에서 "안타깝게도 도중에서 퇴임하게 됐다"고 말하며 총리대신 관저를 떠났고, 이로써 아소 내각은 막을 내렸다.

3. 정책
아소 내각은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며 참패했다. 자유민주당 소속 현직 국무대신 6명이 소선거구에서 낙선했고, 총리였던 아소 다로는 사실상의 퇴진을 표명했다. 선거 후 WTO 각료 회합 등 예정된 국제 회의에 내각 각료들이 불참하여 "각료로서의 책무와 마지막 일을 포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76] 2009년 9월 16일, 아소 총리는 내각 총사직을 결정하고 내각총리대신 관저를 떠났다.[77]
3. 1. 경제 정책
아소 내각은 경기 대책을 중심으로 정권을 운영하면서 일본 경제 재건을 목표로 하였다. 2008년 10월 16일, 2008년도 제1차 보정 예산 통과를 시작으로 2008년 제2차 추경 예산, 2009년도 예산, 2009년도 보정 예산 등 네 차례에 걸쳐 경제 대책을 실시했다. 특히 2008년도 제1, 2차 추가 경정 예산과 2009년도 예산 등 3개 예산안을 한꺼번에 편성하여 정부는 이를 '''경기 부양 3단 로켓'''이라고 칭했다.각 대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산 | 총계 | 주요 내용 | 비고 |
---|---|---|---|
2008년도 제1차 보정 예산 | 11조엔 | 안심 실현을 위한 긴급 종합 대책 | |
2008년도 제2차 보정 예산 | 27조엔 | 생활 대책 | |
2009년도 예산 | 37조엔 | 생활 방위를 위한 긴급 대책 | |
2009년도 보정 예산 | 15조엔 | 경제 위기 대책 |
이 외에도 금융기능 강화법 개정, 국민연금법 개정, 근로자 파견법 개정 등 추가 소요 비용을 위해 국제 통화 기금에서 10억엔을 대출하였다. 또한 "단기적 경기 대책, 중기적 재정 재건, 중장기적 개혁에 따른 경제 성장"을 내세우며 사회보장과 3개 재정에 관한 중기 프로그램과 경기 회복 후 단계적으로 소비세를 포함한 세제 개혁을 시도하는 세제 개정에 의욕을 보였다.
중소기업을 금융 위기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금융기관에 대해 일본 정책 금융 공고로부터의 신용 공여를 실시하고, 중소기업에 대한 장기 자금 대출·신규 발행 사채 매입·커밋먼트 라인 설정, 대기업 융자를 통한 관련 중견·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 및 보증 등을 실시했다.[78] 또한 중소기업 세금 우대 제도로서, 중소기업에 대해 당기 결손금을 전기(前期)로 소급하여 전년도에 납부한 법인세의 환급을 받을 수 있는 우대 제도인 소급 환급금을 도입했다.
3. 2. 외교 정책
만모한 싱 인도 총리와 정상 회담을 갖고 '일본 - 인도 안전보장 협력 공동선언'에 서명하여, 안전보장, 경제, 환경, 에너지 등 폭넓은 분야에서 양국의 전략적 공조를 추진했다.[1] 12월 18일 오스트레일리아와 방위 협조 및 정보 공유를 추진하는 내용의 일호 안전 보장 협력 촉진 공동문서를 발표했다.[1]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초청으로 일본과 러시아의 영토 분쟁 지역인 남카라후토(사할린 남부)를 방문했다.[1] 일본 정부는 남카라후토를 러시아 영토로 공식 인정하지 않고, 역대 총리들의 방문을 피해왔다.[1] 아소 총리의 방문은 사실상 남카라후토를 러시아령으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어 논란이 되었다.[1] 일본 국회에서는 아소 총리의 행위를 비판하며, 남카라후토가 러시아령으로 추인된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1] 또한, 남카라후토에서 열린 러시아와의 정상 회담에서 아소 총리는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해 면적 이등분론을 언급하며 4개 섬 일괄 반환론 포기를 시사했다.[1] 이는 전후 일본 역대 정권이 일관되게 4개 섬 일괄 반환을 주장해 온 것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1]
2008년 12월 13일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의 규슈 국립 박물관에서 제1차 한중일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1] 한일 정상 회담에서 아소 총리는 대한민국이 도입을 추진하던 서머타임 제도에 대해 "한다면 함께 한다는 것은 매우 효과가 크다"라고 말하며, 한국과 동시에 일본에서도 도입하면 더 큰 효과가 있다고 언급했다.[1]
아소 총리는 일본이 보유한 달러를 국제 통화 기금(IMF)에 대출하겠다고 발표했다.[1] IMF는 아이슬란드에 긴급 대출을 시행했고, 아이슬란드 외무장관의 정치자문은 "일본 덕분"이라며 감사를 표했다.[1] 11월 14일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전무이사는 일본의 자금 제공, 리더십, 다자간 협조주의 등의 활동을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공헌이라고 평가했다.[1] 11월 15일 일본과 세계은행은 개발도상국 은행 지원 펀드 설립을 결정하는 등, 경제 위기에 대한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각국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1]
2009년 2월 14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개최된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 합동회의에서 세계적 금융 위기 극복과 각국의 재정 출동을 의제로 하는 것이 확인되었다.[1] 이 회의에서 일본이 IMF에 1조달러 상당의 자금을 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1]
3. 3. 유라시아 횡단 도로 구상
아소는 2009년 6월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방의 인프라 정비를 지원하는 "유라시아 횡단도로 구상"을 발표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안정과 번영이 상승 효과를 올리면 세계 경제를 크게 끌어올린다. 중국, 인도, 러시아는 이를 위한 중요한 파트너이므로 이런 구상에 지금 말씀 드린 나라들이 관심을 갖는 것을 매우 환영한다"라고 하며 주변국에 참가를 호소했다. 이 구상의 구체적인 지원 내용으로는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거치고 아라비아해에 이르는 경로의 도로, 철도의 정비", "중앙아시아에서 코카서스를 거쳐서 유럽에 이르는 경로에 있는 카스피해 연안 항만 정비"의 두 가지 계획을 구상하였다.4. 인사
2008년 9월 24일 제170회 국회에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가 열렸다. 중의원은 자유민주당 총재인 아소 다로를, 참의원은 민주당 대표인 오자와 이치로를 지명했다. 양원 협의회에서도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중의원 우세 원칙에 따라 아소 다로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아소 총리는 당일 천황이 거주하는 어소에서 내각총리대신 임명식을 거쳐 정식으로 취임했다. 이후 이례적으로 총리인 아소가 직접 각료 명단을 발표하고 각 장관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는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 비서진 임명 인사를 발표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9월 25일, 국회는 내각법 제9조에 의거하여 총리에게 사고가 발생할 경우 임시 대리 취임 순위를 내각관방장관 가와무라 다케오,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요사노 가오루, 총무대신 하토야마 구니오, 재무장관 나카가와 쇼이치,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아마리 아키라 순으로 결정했다. 또한, 각료 간담회에서는 재정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역대 내각과 마찬가지로 장관 급여의 1할을 국고에 반납하기로 합의했다.
4. 1. 특징
- 내각 대신의 평균 연령은 58.2세로 이전 내각보다 약 4세 젊어졌으며, 50대 이하 각료가 10명을 차지했다. 최연소 각료는 34세의 오부치 유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이었다. 그러나 후쿠다 야스오 내각에서 처음 입각한 각료가 5명 재임되었고, 아베 내각의 11명에 비하면 절반 이하이며, 고이즈미 내각의 5.8명을 넘어서 젊은 내각을 의도한 결과는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32]
-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손자인 아소 다로 총리를 비롯하여, 하토야마 유키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오부치 게이조 등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총리대신을 역임한 각료가 4명이었다. 이들을 포함한 세습 정치인은 후쿠다 개조 내각의 9명을 웃도는 11명으로, 언론과 야당은 "세습 내각", "도련님 내각"이라고 비판했다.[32]
- 총리를 제외한 무파벌 의원은 4명으로 고이즈미 내각 이후 가장 많았지만, 아소 총리가 자민당 내 소수 파벌 출신으로 다수 세력의 지지를 받아 성립된 배경에는 파벌 균형과 논공행상의 측면이 있었다. 또한, 여성 각료는 마스다 히로야 총무대신 퇴임 이후 한 명도 없었다.
- 고이즈미 내각 이후 개각 인사 정보는 일절 발설하지 않는 비밀주의가 유지되었으나, 아소 내각 구성에서는 자민당 총재 선거 과정에서 사전 인사 정보가 유출되어 자주 보도되었다. 총재 선거와 휴일을 겸한 총리 지명, 개각 당일 아침에는 언론들이 각료 명단을 발표하는 등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 아소 내각은 초기 약 50%의 지지율을 보였으나, 2008년 12월에는 20%로 하락했다.[9] 당내 분열[9]과 함께, 다음 선거에서 아소 총리의 당 장악력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10]
- 정부는 금융 위기의 영향에 직면했으며, 내각이 조기에 재정 예산을 제출하지 않아 인기가 하락했다.[11][12][13] 총리의 발음 실수 논란과 두 전임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임은 집권당에 타격을 주었고, 대중은 당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14][15] 2009년 1월에는 정부 지지율이 11%로 더욱 하락했다.[16]
- 2009년 2월 17일, 나카가와 쇼이치는 G7 회의 기자 회견에서 졸음 증세를 보인 후 재무대신직에서 사임했다.[17] 오자와 이치로가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내각 지지율이 반등하기도 했으나,[18][19] 하토야마 유키오가 야당 대표를 맡고, 총무대신 하토야마 구니오가 일본 우편 홀딩스 사장 교체 문제로 6월 12일 사임한 후, 내각 지지율은 다시 "위험한 상황"으로 떨어졌다.[20][21]
4. 2. 잇따른 각료 교체
아소 내각은 발족 초기에는 약 50%의 지지율을 보였으나, 여러 논란과 경제 위기 대응 실패로 인해 지지율이 급락했다. 특히 각료들의 잇따른 사임은 내각에 큰 타격을 주었다.- 나카야마 나리아키 국토교통대신은 취임 5일 만에 논란이 된 발언으로 사임했다.[33]
- 나카가와 쇼이치 재무대신은 G7 회의 기자 회견에서 술에 취한 듯한 모습을 보여 사임했다.[17]
- 하토야마 구니오 총무대신은 일본 우편 홀딩스 사장 교체 문제로 사임했다.[20]
이 외에도 내각부의 마쓰나미 겐타 정무관이 2009년 1월 수정 예산안에 대한 기권 투표로 해임되었고,[33] 3월에는 히라타 코이치가 장관 규정을 위반하여 재무 부대신에서 사임했으며, 5월에는 고노이케 요시다다가 경비 스캔들로 인해 내각 부장관에서 사임했다.[33] 도이다 토루 후생노동대신 정무관도 하토야마 구니오 총무대신의 사임에 대한 항의로 사임했다.[33]
하야카와 다다히데 법무대신 정무관과 후루카와 요시히사 환경대신 정무관도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결국 유임되었다.[33][34][35]
이처럼 아소 내각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주요 직책을 맡은 인사들이 연이어 사임하는 사태를 겪으며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5. 국무 대신
자유민주당 (아소파)
내각부 특명담당 대신
(지방분권개혁담당)

자유민주당 (쓰시마파)
자유민주당 (고가파)
자유민주당 (아소파)

자유민주당 (이부키파)
내각부 특명담당 대신
(금융 담당)

자유민주당 (이부키파)

자유민주당 (무파벌)
자유민주당 (마치무라파)

자유민주당 (무파벌)

자유민주당 (쓰시마파)

자유민주당 (니카이파)

자유민주당 (마치무라파)
자유민주당 (이부키파)
2008년 9월 29일 사임
자유민주당 (고가파)
공명당

자유민주당 (무파벌)

자유민주당 (이부키파)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취임순위 1위
내각부 특명담당 대신
(오키나와 및 북방 대책 담당)
(방재담당)
자유민주당 (고가파)

자유민주당 (야마자키파)
(경제 재정 정책 담당)
자유민주당 (무파벌)
2009년 7월 2일 면직

자유민주당 (고가파)
(규제 개혁 담당)

자유민주당 (야마자키파)
공무원 제도 개혁 담당
내각 총리 대신 임시 대리 취임 순위 5위[211]→ 제4위[212]→ 제3위[213]
(과학기술정책 담당)
(식품안전 담당)
(소비자 담당)

자유민주당 (무파벌)
(저출산 대책 담당)
(양성평등 담당)

자유민주당 (쓰시마파)